한겨울 수목원에서

휴일 아침 차를 몰아 서해안 고속도로에 올랐다.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 2시간만에 충남 태안 끝자락 모항항에 닿았다. 모항항 – 발음이 참 어렵다. 한겨울의 작은 항구는 오가는 사람도 배도 없이 찬바람만 쌩쌩.

수목원도 식후경

문을 연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. 따끈한 국밥이나 한그릇씩 하면 좋겠는데, 이 시간에 고를 수 있는 메뉴는 우럭젓국과 게국지 뿐이라는 상냥한 듯 단호한 주인의 선언에 어쩌랴. 우럭젓국으로 거하게 아침식사를 했다.

모항항을 출발해 5분만에 도착한 오늘의 진짜 목적지는 천리포 수목원. 언젠가 한 번 가봐야겠다 생각했지만 한겨울에 처음 찾게 될 줄은 몰랐다. 우리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했는데, 관광버스가 몇 대 주차장으로 들어온다. 우리같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구나.

초입의 오솔길을 지나 큰연못정원에 들어서자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낯선 식물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. 실거리나무, 왕초피나무, 삼지닥나무 … 대부분 제주와 남부지방에서 자생하는 이들을 한겨울 야외에서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.

완도호랑가시나무
민병갈선생이 발견해 세계에 알린
완도호랑가시나무

전세계 목련의 보고

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천리포 수목원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840여 목련류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. 최초로 수집한 목련은 바로 우리나라 자생종인 함박꽃나무라고 한다.

목련속 식물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다. 5천 8백 ~ 3천 6백만 년 전의 화석이 그 증거로, 은행나무와 유사한 시기에 출현하였다. 목련의 수분 매개자가 벌과 나비가 아닌 딱정벌레인 이유는 그 시기에 벌과 나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.

‘천리포수목원의 목련 종류’ 안내문 중에서

60여 년 전, 전승국 장교 출신에 재력 있는 미국인 칼 페리스 밀러 Carl Ferris Miller 는 어떤 생각으로 이곳을 선택한 것일까. 소나무숲으로 둘러 쌓인 바닷가, 썰물 때 건널 수 있는 작은 섬이 있다는 것 말고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데.

목련 Starwars

그 때의 그는 몰랐다

사실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. 1970년, 공해에 시달리는 서울을 떠날 때까지 이 곳을 묵혀두었다. 뒤늦게 은거지에 어울리는 꽃과 나무를 심어 가꾸기 시작했을 뿐, 장차 이곳이 세계적인 수목원이 될 줄, 국적을 바꿔 눌러 살다가 이곳에 묻히게 될 줄, 그 때의 그는 몰랐다.

수목원을 반 바퀴 돌아 해변이 내려보이는 소나무 언덕에 닿았다. 섬 하나가 외롭게 물 빠진 바닷가에 앉아 있다. 섬 앞까지 길이 열려 있었지만 바람이 너무 세서 해변에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.

언덕을 내려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사위가 조용하고 포근하다. 낮은 소나무숲이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. 세계를 돌며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늘 외로웠던 그에게 오로지 이 정원만이 변함없는 위안과 평화를 주었을 것이다.

함박꽃나무가 꽃피는 초여름에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.

천리포수목원과 설립자 민병갈 선생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.

삼지닥나무
삼지닥나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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